13.장백현 제2실험소학교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 13.장백현 제2실험소학교
13.장백현 제2실험소학교
◇제2실험소학교」를 찾아서
날씨는 무더웠다. 송강하에서 오전 9시 40분에 출발하여 장백에 도착한 것이 오후 1시 50분이었으니까, 북한땅 혜산시와 가장 가까우며 강폭이 가장 좁은 압록강 상류지역인 이곳 장백현은 날씨가 무덥다기 보다 가을 초입에 들고 있다고 표현해야 옳을 듯 하다. 맨먼저 찾아간 곳은 「장백 조선자치현 제2실험소학」이었다. 이 소학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시.소설.평론까지 두루 쓰고 있는 황영성씨와 동행한 내친구 소설가 박월리씨와 사전에 연락이 닿아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앞서말한 「제2실험소학」이란 조선족학교라는 뜻으로 이곳에서는 그렇게 표기하는 모양이다. 「제1실험소학」은 한족소학교로 나중에 황영성씨로부터 들어서 알았으며 특히 장백현은 유일한 조선족자치현, 그러니까 조선족끼리 모여사는 밀집지역이라는데 더욱 반갑게 느껴졌으며 편안하게 안겨드는 것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로 말할것 같으면 낙후된 시골 소읍 풍경이라고 할까. 황영성씨를 만나기 전 우리 일행은 장백조선족소학교를 찾는데 사실은 애를 먹었다. 중학교를 찾아가기도 했으며 제1실험소학교를 찾게 되기도 했으니까. 또 제1실험소학교와 제2실험소학교가 건물을 서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에 번거러움이 있었으며 조선족소학교라는 이름은 쓰여지지 않고 제2실험소학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니 더욱 그러했다. 어쨌든 세번째로 물어서 드디어 찾게된「제2실험소학」이라고 써붙여진 교문을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우리 시골초등학교의 초라함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교건물은 아마 일제시대에 지은 것처럼 오래되었으며, 벽보판이 길게 세워져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아직도 칠판에다가 여러가지 색깔의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놓은게 이색적으로 보였으면서도 다정다감하게 느껴졌다. 황영성씨는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한참을 서성거렸다.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이 신기하게 보이는 듯 쳐다보고 바라보고 하다가 말문을 열기도 했는데 바로 그 중년아주머니가 이 학교 교사라는 거였다. 우리는 조금 놀랐다. 별치장없이 수수하게 차려입은 차림새로 보아 시골 학부형이 학교에 찾아온 것같이 느껴졌는데 이곳 소학교 교사라니?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인데, 그분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받았던 느낌을 그대로 글로 쓰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 조금후, 황영성씨가 나왔을 때 그분과 함께 기념촬영하기도 했으니까 우리 일행에게는 다행이었다. 황영성씨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시화 소설을 주로 쓰며 평론까지 겸하고 있는가 하면 몇해전 북한미술대전에도 참가한 우수화가 렛델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동북삼성 일대 신문 잡지에 삽화를 그리고 있는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였다.(그가 보여준 조선족 여인상을 그린 삽화와 뒤에 한국으로 보내온 조선족여인 초상화를 이 지면을 빌어서 소개하겠다.) 곧이어 리춘섭 교장선생님께서도 마중나와 먼길을 온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맞으며 소학교 정문 옆에 있는 식당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조선족자치현이라 음식에 대해서 다소 안도했으나, 역시 중국음식 특유의 그 상차림냄새는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돼지고기 조림이나 쇠고기볶음이나 생선찜이나 한결같이 그 냄새는 코를 찔렀다. 단지 감자채볶음이 나왔는데 이는 덜했다. 중국 만주땅 어딜가나 빠지지 않는게 술 그중에서도 맥주는 필수였다. 대낮인데도 점심먹는 상위에 맥주가 오르고 이맥주는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는 식탁문화에 우리 일행은 으아해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 되었다. 리춘섭 교장선생님은 식당까지 와서는 우리 일행을 접대안내를 하고 학교일로 먼저 가셨고, 황영성씨와 함께 하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붉은 머플러
냉면을 시켜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다시 소학교 안으로 들어와서 한참의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그러니까 학교안을 샅샅이 둘러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는데 소학교 어린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중에 색동저고리 한복을 입은 어린이도 몇이 눈에 띄었다.
한결같이 목에 붉은 머플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일념의 표상이었다. 이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한없이 슬퍼졌다. 같은 형제 같은 핏줄인 조선족어린이들이 목에두른 저 붉은 머플러를 벗지 않는한 국적은 중국임이 엄연하며 그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처절한 운명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천진난만한 저 애들의 목에 두른 붉은 머플러를 벗어던져 주겠는가.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잘도 뛰어노는 저 애들을 보라. 아무것도 모른채, 제 나이만큼 천진한 마음으로 줄넘기를 하며 발맞추어 공중을 뛰는가 하면 빙빙 돌아가며 게임을 하는 저 애들은 우리의 민족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한 것은 같은 핏줄 민족인데 처해있는 곳이 다르기에 모든 제도 문화풍습까지 달라질게 뻔하니까 말이다. 그 애들은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도 같이 기념사진을 찍고 말을 건네고 하는데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복도 벽의 위인이야기
알고 보니, 이곳 소학교는 며칠전 개학을 했다고 한다. 방학동안 학생들이 일제히 학교 나오는 날이 있기 마련이어서 이날따라 온 교정이 분주한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닌 개학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으며, 또 방학이 끝난 2학기 개학이 아니라, 새로 학년이 올라가는 새학기 개학인 것이었다. 우리 한국에서는 3월인 새봄을 맞아 새학기가 시작되는데, 중국 동북삼성 이곳에는 8월이 다 가기전 새학기가 시작되니 교사들도 바쁠 수 밖에. 그래선지 우리 일행과 점심식사를 함께 한 황영성씨도 우리를 기다리라 해놓고 업무를 보는 업무시간인 것을 처음에는 몰랐던 것이다. 그 덕에 우리는 소학교 전반을 둘러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복도를 지나치다가 나는 복도벽에 판넬로 붙여놓은 많은 인물들의 사진과 행적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역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로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즉, 한국의 초등학교에도 보면 복도벽에 세종대왕이나 을지문덕, 안중근 이런 위인들의 사진을 걸어두어 어린이들에게 애국심을 키우는데, 이곳 소학교 벽면에는 모두가 중화인민공화국 위인들로 메워져 있다는 것. 또 그 모두가 투쟁열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다루는 위인은 전투열사들의 공적으로 평가되는 그 이상 이하가 없듯이 그것이 애국심의 초점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황계광(黃繼光)의 경우 한국전쟁때 가슴으로 막은 중국 인민지원 특급영웅이며, 동존서(董存瑞)라는 인물은 중국인민해방군 전투영웅, 인소운(印少云)은 중국인민해방군 일급영웅, 백구은(白求恩)은 캐나다 여성으로 국제공산주의 전사 등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 위인들이었다.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소학교 어린이들이 중국인 학생이라면 몰라도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어가진 한민족 어린이들이니까 하는 말인데, 운명이 달라서 다른나라의 위인을 흠모하고 따라가는 교육을 받아가며 성장해야 되니 이 얼마나 엄청난 슬픔이란 말인가.
◇흑판보 앞에서
이 뿐만이 아니었다. 소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길게 세워져 있는 칠판에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슬픔이 있었다. 칠판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이나 모든 내용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상교육 그대로였다. 「1999. 제18기 흑판보」가 그것인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수령 모주석께서는 호남성 소산에서 태어났어요. 모주석께서는 어릴때부터 책읽기를 매우 즐겼어요. 그는 혁명의 큰뜻을 품고…」를 비롯해서 「리홍지와 <법륜공>을 철저히 배격 비판하자!」는 내용에서는 「리홍지는 <법륜공>이란 것을 조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씌워준 죄인이예요. 리홍지는 <법륜공>을 하면 죽어서 천당과 서방극락세계에 간다는 황당한 론조를 퍼뜨렸고…」 이렇듯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한 내용들로 메워져 있었다.
◇황영성 교사
재미있는 것은 이 벽보판을 장식하는 이가 미술교사 황영성씨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황영성씨는 남달리 김일성 우상화의 찬양론자였다. 그러기에 당연히 모택동같은 중국공산당 우두머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교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토양인 것은 부인할 순 없으나 그게 투철한 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만난 우리 일행에게도 서슴없이 김일성을 찬양했다. 찬양 이상으로 격분하다시피 했으니까 말인데 보기드문 김일성 찬양론자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모택동도 김일성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으며 한국의 대통령의 경우는 김일성의 위대함과는 비교도 안된다는 식으로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이는 우리 일행이 예견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장백으로 흘러들어오기 전 장백에 가면 황영성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 분이 있었다. 길림의 「도라지」 잡지사의 고신일(소설가) 선생인데, 자신의 제자가 장백에 있는 황영성 교사라는 것이었다. 가서 만나되 생각이 아주 다르니 미리 알고 가라는 것과 그가 무슨 말을 하던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조용히 듣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영성씨는 철저한 북한공산주의 사상의 첨단을 걷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 그늘을 걷어낼 길이 없음을 안 우리 일행은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 돼버렸다.<계속> |
TOP Copyright ©2000,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