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8.오회분 4호묘를 찾아서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8.오회분 4호묘를 찾아서
8. 오회분 4호묘를 찾아서
◇장군총 가는 길
이튿날 아침 일찍이 조선족 최창길씨 아파트에서 짐을 챙겨나온 우리일행은 어제 그 「부산 식당」으로 가 아침밥을 먹고 바로 최씨가 섭외해 온 9인승쯤 되어 보이는 승합차를 타고 장군총으로 향했다. 「장군총」은 어느 산변두리에 있는게 아니라 어느 들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차창밖으로 훤히 내다 보였다.
여기가 옛 고구려 도읍지였는가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중국에서는 변방인 이곳도 도심화 물결이 일어 길이 포장되고 아파트를 비롯해 빌딩들이 생겨나 그 미관은 말이 아니었다. 「장군총」으로 가는 길은 마을안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좁았으며 농촌서민들의 집들로 즐비해 있었다. 우리 앞을 가던 대형관광버스 두 대가 차를 세웠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내려서 북적대고 있어서 우리 일행을 싣고 가던 승합차도 멈추어 섰다. 알고보니 「오회분 4호묘」였다.
◇오회분 4회묘에 들어서다
집안역으로 부터 500m 떨어져 있는 이곳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로 근처에 비슷한 크기의 다섯개 고분이 밀집해 있어「오괴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높이는 8m 무덤 둘레 길이는 180m라 한다. 바로 맞은편에는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어 관광이 허용안되는 「5호묘」라 이름붙인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보라, 늘 우리가 말해 왔듯이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산자들만 찾아와 북적거리는 인간세상이 아닌가. 그런데 허무한것은 죽은 자들이 남기고 간 것은 죽은 자들이 보호 관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에 많은 세월이 흐르다 보면 잊혀지고 방치되어버린다는 사실앞에와 서 있으니까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을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의 땅이었고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남긴 것이니 바로 우리의 것임엔 분명한데 이 고구려의 영토가 벌써부터 중국 영토가 되어 버렸으니까. 우리는 능력이 없이 되어 버렸으며 그나마 걸식하듯 해야하는 입장이 돼버렸으니 이런 역사의 아픔은 와서 느껴보지 않고는 그냥 말로 다 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기에 고개 내밀어 먼저 철물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솔직히 이때까지만해도 잘 몰랐었다. 들어가 볼까말까 하다가 입구쪽으로 가 입장권도 사지 않고 사람들틈에 휩쓸려 들어가 보았다.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장 찍었는데 앞에서 말한 「4호묘」입구였다. 무덤 안은 좀 낮게 내려가다가 평평한 공간으로 돼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했으며 찬바람이 풍겨져 나와 추웠다. 벌써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와 그 안을 꽉채우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전기선으로 불을 밝힌 알전구를 손으로 높이 들어 비추고 있었고, 한사람은 조그만 플래시를 들고 사방벽면과 천장 및 천장난간의 오색찬란한 그림을 하나하나 비추며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한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고구려!」가 이곳에 또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벽화의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오회분 4호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으며 일월신, 농사신, 불의신, 바퀴를 만드는 신, 대장장이신 북치는 신, 전쟁신, 피리부는 신 등 인류문명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신들의 형상을 묘사한 것들 뿐만이 아니었다. 고구려벽화 하면 우리가 최고로 꼽는 「세발 까마귀」가 그려져 있는 태양을 받들고 있는 남자와 뚜꺼비가 그려져 있는 달을 머리에 이고있는 여자의 그림이 고구려인의 신앙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천장 중앙에는 비천하는 그 옆에는 선녀가 생황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인물의 모습, 왼쪽에는 수공후로 보는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의 모습과 또한 천장중앙에는 황제를 상징하며 용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황룡이 금방이라도 살아숨쉬는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500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빨강 노랑 파랑등 고구려벽화중 가장 화려한 색채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탁월한 솜씨다. 서로 뒤엉켜 꿈틀대는 39마리의 용과 네 벽면을 뒤덮은 나뭇잎 문양의 화려한 색상 등이 그것이다. 화려한 천장 문양의 하나인 황룡의 눈에는 보석이 박혀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금은 누군가가 떼어가버린 그대로 남아있는게 못내 아쉬웠다. 군데군데 그림들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버린게 눈에 띄었으나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고구려벽화라는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듯,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탁월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간 것이다. 찬 기운이 무덤 안을 엄습하고 습기가 양 벽면에 서려 있었으나 조금도 변함없이 1500년을 꿋꿋이 견디어 온 「4호묘」를 수많은 역사가 거듭되어도 우리는 까맣게 모르게 지내왔던 걸 생각해보라. 1962년에야 본격적으로 발굴되고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 「4호묘」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그 화려한 문양들을 찍기 시작했는데 (겁도 없이, 사실 나는 겁이 없는 편이다 들이밀기 식의 스타일이다). 옆에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기에 그만 두었는데, 카메라 촬영금지임은 당연했다. 보아하니, 저쪽에는 안내원 아가씨가 서 있는데 바로 감시원인 것이었다. 나는 몇 장면 찍은 것만으로 다행하게 생각했다. 우리의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말이다. 이 보다 더욱 서글펐던 것은, 왜 이 고분들이 더러 파손되었으며 검게 그을렸는가 하는 것이다. 30∼40여명과 함께 온 관광객을 이끌며 안내하는 중년의 한 남자에 의하면 한때 중국측에서 방치해 두는 바람에 거지들의 안식처가 되어버린 나머지 많은 훼손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곳「외회분 묘」를 보더라도 현재 유일하게 「4회분묘」만 문을 열어 관람을 허용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다시 문을 잠가버려 역사속으로 깊은 잠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회분 5호묘 앞에서
「오회분 4호묘」를 빠져 나왔을때의 기분은 이러했다. 1500년전 컴컴한 과거 시간속으로 들어가 있다가 바깥을 나와 환한 햇빛이 내리쬐고 접시꽃 분꽃사루비아와 같이 붉게 피어있는 꽃들이 안전에 나타나는 걸 보니 분명히 현실이었다. 그 사이 촌음같이 1500년전의 과거시간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미래의 시간을 향해서 가는 건 분명한데 미래의 시간이라는게 기약없는 것이고 보면 더욱 길손에게는 막막한 것이 된다. 철문밖으로 나와 길 건너편「5호묘」를 바라보았으나 그곳 철문은 굳게 입다물고서 아무말이 없다. 불러도 대답없는 과거시간들이 「4호분」처럼 깨어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물쇠로 굳게 잠겨 그대로 미래시간 쪽을 가고 있다는 생각뿐. 저기 아까부터 언뜻언뜻 차창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어 보이던 「장군총」으로 향하는 것밖에는 없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고대 고구려나라의 길손이 되어 나는 다음에 일어날 과거 역사 시간속으로 또 가야 하는 것이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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