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환인(桓仁) 가는 길
■제1편 서지월시인의 만주대장정-2.환인(桓仁) 가는 길 2.환인(桓仁) 가는 길
이튿날 단동시의 아파트민박에서 새벽같이 빠져나와 아침식사를 드는 둥 마는 둥 단동시외버스터미널로 택시를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쏜살같이 행했다. 마침 인천에서 단동으로 들어올때 배안에서 만난 한국인이, 정확히 말하면 단동에서 가요방 영업을 한다는 젊은 청년이 투숙도 우리와 함께 했기로 그가 중국말을 잘 하기에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얼른 오전 8시발 환인행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대부분 넓디 넓은 만주땅이 그러했듯이 기차를 비롯해 버스시간대라는게 출발시각이 하루에 한번밖에 없다. 이 차시각을 놓치면 무료하게 하루를 더 눌러앉아 있다가 그 다음날 떠나야 한다. 자칫하면 엄청난 차질을 초래할 수 있게 된다. 난생처음으로 듣던 이름의 「환인」이라는 도시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하듯이 그 환인으로 가기 위해 6시간을 버스에 몸을 맡겨야 한다. 게다가 가이드가 있어서 함께 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단동에서 그곳 문인들과 만찬을 가졌을때 단동시 조선족중학교 조선어문 교사로 있는, 교직생활 33년째가 된다는 52세의 백운숙씨가 1년 선배인 환인조선족학교 김안영 선생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전화로 연결해 주어 우리 일행이 환인에 도착되는 시간에 나와 주기로 한 것 그것 하나의 끄나풀을 갖고 갈 뿐이다. 실은, 「환인」이라는 도시는 한국인으로서는 부끄럽지 않게 꼭 알아야 할 지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도 사전지식 부족으로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승차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밟아야 할 일정으로 놓여있는 백두산을 가거나 연길을 향하자면 비행기로 날아가지 않는 이상은, 단동에서 출발하려면 거쳐야 하는 것이 환인인 것이다. 환인 다음 가야할 곳이 집안인데 이 집안이라는 곳을 가기 위해서라도 비행기로 날지 않고는 환인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집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광개토왕비」가 있고, 「환도성」「무용총」등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성」「환도성」이라하여 역시 고구려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환인을 모르다니 이건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가 환인이라는 걸, 그리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과 「졸본성」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중국땅 가운데 만주 요녕성의 환인이라는 곳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여 동명성왕이 되고 그의 아들 유리왕 21년까지 저 눈부신 고구려의 첫 도읍지라는 것을 작금에 알았으니까 말이다. 단동에서 환인을 가는데는 몇개의 소읍을 지나야 했다. 우리 형편으로 보면 30년전쯤의 시골버스와 다름없는 덜컹거림 속에서 가다가 세우고 또 가다가 세우기마저 수십번을 거듭하는 그야말로 완행 시골버스였다. 버스 안에서는 우리 여섯명의 한국인 일행 이외에는 모두가 중국인 시골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우리들끼리의 대화로 버티어 나가는게 고작이다. 머리위 선반에 올려져 있는 수박이 떨어져 아수라장이 되질 않나, 그 덜컹거림의 연속이 내 학창시절 아침 저녁 시골에서 대구로 통학하던 때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대만주벌판 장정의 첫 출발이 이 버스인 만큼 어디로 행하든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었던게 사실이다. 여기서, 억수로 재미있었던 것은 두 가지를 말하겠는데, 그 하나는 이렇게 버스가 장거리를 운행해야 하기에 어디쯤 가다가 머물렀다. 알고보니 일제히 볼일을 보라는 거였다. 우리 일행도 모두 내렸다. 그런데 공중변소가 있는데, 물론 지저분해서 이겠지만 모두 그 바깥에서 마구 쏴대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보건말건 같은 버스에 탔으니 한가족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남자들은 마구 쏴 대는 것이었고 여자들은 조금 떨어진 둔덕밑에서 또 누가 보건말건 엉덩이 까고 앉아 막 쏴대는 것이었다. 물론 시원했겠지 우리들도 시원했으니까. 또 한번은, 버스가 4시간 정도 달렸을까. 버스 정류장 표지판은 없는데 식당집 한채가 있었으며 오래된 나무그늘, 그 아래에는 빙과류와 음료수 파는 노점상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 내리라고 해 놓고는 버스 승강문을 잠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도 알고보니 쉬어간다는 것인데 한 30분의 시간의 바로 그 쉬어가는 시간인 것이다. 바쁠게 무엇있느냐는 것 같았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쉬어가면 쉬어갈 마련이지, 모두 내리라 해놓고 승강문까지 잠가버리는 그 앞에 우리는 참말이지 웃음이 나왔다. 이걸 재밌다고 해야 하나 제멋대로의 방식이라 해야 하나. 그러고 나서 이 버스는 평지를 달려도 한나절을 달린 기분으로 시골길은 끝없이 보였다. 게다가 나중에는 산고갯길을 넘는데도 몇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높은 산고개를 빙빙 돌아가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너무나 길었던 시간같이 첫 운행소요시간이 6시간 20분이었다. 우리들에겐 낯선 버스타고 6시간 20분을 걸렸으니까. 환인에 다가갈 무렵, 차속 손님들도 타고 내리고를 연속한 나머지 빠져나고해 헐빈해졌는데 중국인 젊은 청년 넷이 우리 좌우 뒤쪽에 앉아서 무어라 재미있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어쩌다가 우리하고 눈길이 마주쳐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어도 서로 계속 지껄이는게 재미 있었다. 알아듣지 못한 말을 주고 받으며 박장대소를 했으니 이는 분명 재미있고 즐거운 웃음판이었다. 그 젊은 친구가 그림을 하나 꺼냈는데 내가 맘에 들어 달라고 했다. 값이 얼마냐고 물어보니 4원인데 (중국환으로) 옆의 친구가 그린거라 한다. 단동의 저녁만찬때 식당 안방에 걸려있는 것과 같은 대나무 붓으로 한자를 상형문자식으로 그린 특이한 서화였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에 나는 얼른 호주머니에서 4원을 꺼내 건냈는데 그 돈이 돌아왔다. 돈을 안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은 그냥 주겠다고 내밀었다. 나는 이런 착한 청년들이 요즘 세상에 있나 싶어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고맙기도 해 나는 자리를 바꾸어 그들에게로 가 사이에 끼어 앉아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떠들어댔다. 전혀 말이 안통해도 마음은 통했다. 간혹 영어와 한자를 종이에 번갈아가며 써보이며 의사소통이 조금은 되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그 서화를 그린 장본인인 젊은 친구가 자신의 이름자를 한자로 써보였는데, 서장룡이라고 바로 나하고 종씨가 아닌가. 그래서 또 우리는 반갑다고 하고 옆에서는 더 크게 떠들어 대었다. 그들은 우리 일행과 함께 환인에 내려서는 단체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져 갔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그 젊은 친구들과 이제는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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