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구려 도읍지를 오르다
◇오녀산성을 오르며
저 높다란 '하늘의 병풍'같은 천애(天涯)에 드디어 오르기 시작한 것은 한낮으로 중천의 해 가 옮겨가고 있는 때였다.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실감을 찾아야 한다는 설레임이 눈앞을 가렸다. 평지에서 계속해서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길을 오르는데 녹음은 짙푸렀으며 파란 하늘엔 흰구름이 오녀산성 위로 솟아올라서 일대 풍광이 장관을 이루었다.
◀장엄한 '오녀산성'.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해 첫 도읍을 정한 홀승골성
이제까지는 까맣게 잊고 살아왔는데 주몽이 나라를 세운 그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니 이 게 생시인지 꿈인지, 아니면 전전생(前前生)으로 굽이쳐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 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오르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병풍을 두른 듯한 거대한 바 위군상은 한마디로 압도적이었다. 아,아, 고구려!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바로 그 산정밑이 되는 쯤에 넓은 주차공간이 있고 한 채의 집이 있었다. 관리사무소와 같은 곳이었으며 옆에는 생수가 수도꼭지를 통해 펑펑 쏟아져 나왔는데 물맛 또한 최상급 이라 일러준다. 이곳 정기가 스려있는 생수를 마셔보는 감회 또한 새로웠다. 여기서 저 아 래를 바라보아도 환인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으며 굽이치는 능선이 한 나라를 제압하는데 충분하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저 산정까지 오르는데 길이 가파르기에, 레일을 설치해 그 위로 비닐로 지붕을 덮은 열차객 실같은 한칸짜리 객차가 대기해 있었다. 그러니까 케이블카나 삭도가 아닌 레일위에 굴러가 도록 만든 것으로 가파른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교통수단으로 유람객차인 셈이다. 저 가파 른 정상까지는 5~7분정도 걸렸다.
높은 산정에 내려 숲속으로 난 산길을 마냥 들어가 보았다. 듬성듬성한 소나무 사이로 하늘 은 환히 뚫려 있었으며 눈에 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잡초가 하늘을 찌를 듯 키재기 하고 있었으며 개망초꽃 마타리꽃이 멀대같이 자라나 있을 뿐이었다. 리영숙씨가 소개하는 말에 의하면 저 소나무아래가 왕궁터였다고 하는데 주춧돌 하나 기왓장 파편하나 없이 삭막한 잡초밭이 되어버린 현실이었다.
옛말에 아무리 좋은 집을 가지고 부귀를 누렸다 할지라도 자손을 잘못 만나면 제대로 관리 도 못하게 되어 폐가망신하듯 완전 폐허가 돼버렸다. 나는 이 억누를길 없는 비통함에 잠시 멈춰서서 사진 한 장을 찍었지만 그냥 잡초밭에 서서 찍은 잡초밭 풍경사진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산길을 빙 도는데 조금 내려가니까 조그만 연못같은 게 하나 보였다. 이 높은 산정에도 물 이 고여있는 게 신기했으며, 붉은 글씨로 '천지(天池)'라 각인되어 있는 조그만 비석이 그나 마 이곳 현장을 말해주고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즉, 백두산의 거대한 '천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곳에도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수심이 207m로 당시 물을 저장하던 곳 이라 한다.
'천지'를 지나 다시 산길을 따라 가는데 산꼭대기의 평평한 정상이 나타났다. 고주몽의 사당 이 있었던 자리라고는 하나 이 역시 그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다. 고구려 역대 왕들이 왕위 에 오르면 이곳에 와서 시조 고주몽에게 참배했다고 한다.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의 시조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는 말이 남겨주듯 이곳 산정에 서니 천하절경이 여기 말고 어디 있으랴!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깍아지른 절벽아래로 고구려의 젖줄인 혼강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흐르고 있었으며 혼강을 낀 산맥들이 굽이쳐 흐르는 것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게 대장관이었다.
'시조 추모왕(주몽)께서는 북부여 출신으로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을 지나 홀본 서 성산 위에 도읍을 정하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새겨져 있는 홀본 서성산이 바로 졸본으로 이곳 오녀산성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홀승골성인 이곳에서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고구 려의 첫 도읍을 정해 18년간 집정한 역사의 현장이라면 누가 믿을까. 그 어느때나 역사의 흥망은 있는 법이지만 남의 땅이 되어버린 이 절박함 앞에서 무슨 말이 소용있겠는가. 산길 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허탈한 마음 가눌 길 없었다.
고구려시대에는 홀승골성이던 이곳이 지금은 오녀산 산성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우리 일행은 나무 그늘아래 맨땅에 그대로 앉아서 함께한 박태근씨로부터 듣기로 했다.
◇오녀산성 이야기
고구려 이후, 장군 장천룡군대가 염증을 느낀 나머지 처자를 거느리고 호적(오랑캐)을 물리 치러 이곳에 왔다가 산좋고 물이 좋아 터를 마련해 살기로 했는데, 역시 여기에 와 보니 귀 족들이 서민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것을 보고 싸워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녀산에 있는 고구려 최초의 산성앞에 선 필자 서민들의 호평을 받아 처음에는 젊은 남자 3명, 여자 2명에게 무예를 가르쳐 전수하게 되었 는데 그 수효가 많아 져 건장한 남자 5명을 뽑아 청 홍 황 백 흑 즉 오룡(五龍)으로 보내 500리 안전을 위해 각각 다섯 산봉우리를 지키게 했던 것.
그리고, 그중에 무예가 출중한 여자 5명을 뽑아 이 산성을 지키게 했는데 비오는 날 호적이 침입해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비가 오기때문에 아군을 부르는 봉화불을 피울 수가 없게 되어 오녀(五女)가 대항하여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붙여 진 이름이 '오녀산성'으로 오늘날까지 불리어지게 된 그 연원이라 한다.
환인현 정부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다섯 여자의 투항정신을 기리며 환인현의 명산(名山)임을 상징하기 위해 환인현 인민정부에서는 1998년에 '오녀상(五女像)동 상'을 혼강가 시가지 들어가는 입구인 삼거리에 세웠다고 한다.
◇고구려 도읍지를 둘러보며
정상에서 다시 객차의 레일에 미끄러져 내려와 우리 일행은 대기해 놓은 승합차에 몸을 실 어 구불구불한 산길을 서너굽이 돌아나왔다. 이곳에서는 산정을 에워싸고 있는 고구려 건국 당시의 산성을 둘러보는 일이 남아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산성을 둘러보는데 30분 가 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2000년전 산성이 그대로 남아서 이끼로 뒤덮인 세월을 읽고가는 우리 앞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이곳에서 돌 하나를 주워 가방에 넣으려다 따가운 눈총을 쏘아대는 20대 중반 나이의 공안국 감시원 아가씨에게 들키고 말았다.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젊은 아가씨 가 여행사에서 나와 우리일행(여행객)을 안내하는 임무를 띠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 닌 것이다. 철저한 중국인민정부의 교육을 받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 아가씨의 눈빛을 보고 나는 새삼 놀랐다.
이는 비단 이곳에서만이 아니었다. 집안의 광개토왕비를 보러 경내로 들어갔을 때, 비디오카 메라를 가지고 찍는 줄 알고 쏜살같이 달려가서 한국인 관광객의 뭉툭한 카메라를 힘껏 잡 아당겨 빼앗는 힘센 중국인 관광안내원 아줌마를 보는 순간 섬짓했던 것도 다름 아니었다. 그러니까, 흙 한줌 돌 하나 풀 한포기 마저도 만져볼 수 없을 정도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나는 내내 마음이 캥겼다. 속상했다는 말이다. 내 선조의 나라 고구 려의 첫 도읍지에 왔는데 감시까지 받으며 둘러보아야 하는 형편이었으니까
◇환인 시가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고구려 첫 도읍지를 둘러보고 다시 시가지로 내려온 시각은 낮 12시, 이곳 환인도 더운 한낮은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는게 장난감 같았으며 이 게 한국의 시가지와 다른 풍경이엇다. 버스를 타고 집안으로 향할까 했으나 시간도 촉박하 고 해서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기로 결심하고 우리 일행은 더위를 식히며 어제 그 식당에서 냉면을 시켜 먹었다.
집안(集安)은 어디인가. 이곳 환인에서 유리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지로 널리 알 려져 있는 곳이다. 국가의 대사(大事)인 제사에 쓸 돼지를 잡아 쓰려고 돼지를 잡아내다가 그만 그 생돼지가 도망쳐 간 곳을 따라가보니, 산 좋고 물 좋아 새 도읍지로 정했다는 바로 그 유래의 땅이 집안인 것이다. 그때가 바로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 이렇듯 우리도 이젠 환인을 떠나 그 생돼지가 도망쳐 갔던 길을 따라가야 하는 시간위에 놓여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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