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월시인의 현대시창작 해설집]「장독대 석류꽃」<1>
[서지월시인의 현대시 해설집]<1>
(대구문인협회 발간「장독대 석류꽃」에 수록.2006.7)
-아래의 글은 대구문인협회로부터 청탁을 받아 쓴 글인데.
-2006년 제1회 <시민백일장> 수상작품집에 수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칭작 공부에 도움이 되기 위한 취지로 집필되었음을 밝혀드립니다.
-제1회 <시민백일장> 수상작품집에 수록됩니다. (집필자 서지월시인)
[서지월시인의 현대시창작 해설]
좋은 시 읽기와 좋은 시 쓰기의 실제
ㅡ서정주 신동집 황동규 오세영 김명인 감태준 김백겸 최승호 박남희 정숙자 하일지 원희석 조만조 이재무 김세웅 차창룡 최준 박기동 전영주 송찬호 강연호 이정록 박해람 박현수 임선기 권혁웅 김충규 반칠환 정영선 이은림 유자란 서하 김삼경 임해 천수호 장혜승 임수련 이규리 조용미 조말선 윤미전 신지혜 강문숙 김안려 정경진 강가애 이승훈 김승해 이채운 시 중심으로,
서 지 월*
좋은 시라는 것에 대한 정답은 없다. 또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작품을 좋은 시라 명명할 수 있으나 그 감동이라는 것도 꼬집어서 정의를 내리기에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는 일반적 통념을 넘어선 전문적인 소양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전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안목에도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정하지 못하는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은 분명히 존재하며 쉬이 희석되지 않은 특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은 서정시를 줄곧 써 온 서정시인이다. 그것도 그냥의 서정시를 써 온 게 아니라 전통시를 써 온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데 서두에서 첨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 자신의 시 쓰기에 있어서 서정시 즉 전통시를 쓴다는 말이지, 시 읽기에 있어서는 한국의 여러 부류의 시를 거의 놓치지 않고 세심하리만치 총망라해 읽어왔다고 말 할 수 있다. 내가 서정시를 줄곧 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꼭히 서정시 계열 아닌 작품에서 많은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이는 전반적으로 통털어 말하는 시라는 개념 속에서는 같은 얼굴이기 때문이리라.
이 글은 한국의 명시를 선뵈는 자리가 아니라 시창작에 있어서 보다 유익한 시쓰기를 염두해 두고 그 전제하에서 쓰여지는 것이기에 초점을 탄탄한 문장구가 및 뛰어난 상상력 등을 동반한 시편들로 꾸며 보았다. 내게는 시인 개인이나 시 한 편 한 편 마다에 대해 써놓은 해설들이 많이 있으나, 새롭게 쓰는 이유는 신선함을 더해 보자는 개인적인 의도도 깔려 있다.
이 땅에는 좋은 시도 많고 그렇지 않은 시도 너무나 많음을 느낀다. 그러기에,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우수하다고 보는 시편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시인의 시 위주로 나열해 보았다.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작업은 아니기에 별 다른 의도 없이 예를 들어 선보이는 것이니 편하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시창작론이 따로 있겠는가. 한 편 한 편을 놓치지 않고 음미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다 보면 물미가 터져 요령이 생기고 번뜩이는 감성이 유발될 것으로 믿는다.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를 도식적으로 쓸 수 없듯이, 시 읽기의 태도나 시 쓰기의 연마 역시 무작위로 사래 긴 밭을 갈다 보면 언덕 너머의 세상이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본다.
[1]
먼저, 서정주의 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를 보자.
아조 할수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도라올수업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같이 스러진것들의 形象을 불러 이르킨다.
귀ㅅ가에 와서 아스라히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머언幽明에서 처럼 그소리는 들려오는것이나, 한마디도 그뜻을 알수는없다.
다만 느끼는건 너이들이 숨ㅅ소리. 少女여, 어디에들 安住하는지. 너이들의 呼吸의 훈짐으로써 다시금 도라오는 내靑春을 느낄따름인것이다.
少女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것인가?
오히려 처음과같은 하눌우에선 한마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피ㅅ줄을 그리며 구름에 무처 흐를뿐, 오늘도 굳이 다친 내 前程의石門앞에서 마음대로는 處理할수없는 내 生命의 歡喜를 理解할따름인것이다.
섭섭이와 서운니와 푸접이와 순녜라하는 네名의少女의 뒤를 따러서, 午後의山그리메가 밟히우는 보리밭새이 언덕길우에 나는 서서 있었다. 붉고 푸르고 흰, 전설속의 네개의바다와같이 네少女는 네빛갈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하늘우에선 아득한 고동고리. …… 순녜가 가르켜준 上帝님의 고동소리.…… 네名의少女는 제마닥 한 개ㅅ식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굽흐리고, 차라리 무슨 나물을 찾는것이아니라 절을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 그런것을 찾는것이아니라 머언 머언 고동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있는것이었다. 後悔와같은 表情으로 머리를 숙으리고 있는 것이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잡히지아니하는것이였다. 발자취소리를 아조 숨기고 가도, 나에게는 붓잡히지아니하는것이였다.
淡淡히도 오래가는 내음새를 풍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뿐, 쌍긋한 찔레 덤풀이 앞을 가리울뿐 나보단은 더빨리 다라나는것이였다. 나의 부르는 소리가 크면 클스록 더멀리 더멀리 다라나는것이였다.
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
애살포오시 웃음 지으며, 水流와같이 네개의 水流와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였다.
한줄기의 追憶과 치여든 나의 두손, 역시 하눌에는 종다리새 한마리, ㅡ 이런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것이였다. 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
少女여. 내가 가는날은 도라 오련가. 내가 아조 가는날은도라 오련가 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 머리털로 내 손끝을 스치이련가.
그러나 내가 가시에 찔려 앞어헐때는, 네名의 少女는 내곁에 와 서는 것이었다. 내가 찔레ㅅ가시나 새금팔의 베혀 앞어헐때는, 어머니와 같은 손까락으로 나를 나시우러 오는것이였다.
손까락 끝에 나의 어린 피ㅅ방울을 적시우며, 한名의少女가 걱정을하면 세名의少女도 걱정을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앍안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나의像처기는 어찌면 그리도 잘 낫는것이였든가.
정해 정해 정도령아
원이 왔다 門열어라.
붉은꽃을 문지르면
붉은피가 도라오고
푸른꽃을 문지르면
푸른숨이 도라오고.
少女여. 비가 개인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 어데서 쉬는 숨ㅅ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있는가.
멫포기의 씨커운 멈둘레꽃이 피여있는 낭떠러지 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하나의 精靈이되야 내少女들을 불러이르킨다.
그들은 역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것이다. 내속에 내리는 비가 개이기만, 다시 그 언덕길우에 도라오기만, 어서 病이 낫기만을, 그옛날의 보리밭길 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기대리고 있었든것이다.
내가 아조 가는날은 도라 오련가?
ㅡ서정주 시 ‘무슨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전문.
이 시는 한국 현대시 가운데 가장 긴 제목으로 쓰여진 시로 알고 있다. 서정주의 초기시에 해당되는데, 제목에서 먼저 알 수 있듯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이러저러한 편린들을 기저로 하고 있다. 또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서정주다운 신통력이라 할까, 압도적으로 눈에 띈다.
시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면, 젊은 시절 동무였던 네 명의 소녀가 등장하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세상을 달리한 존재들이다. 그 네 소녀를 떠올리며 시인은 환상에 젖기도 하는데 배경은 한국의 자연세계 즉 젊은 날 추억의 현장 그 자체다. 그렇다면 막연히 과거를 추억하는 시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는데 있다. 세상을 달리한 네 명의 소녀를 통해 시인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터특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섭섭이와 서운이와 푸접이와 순네’라는 토속적인 이름들과 ‘네명의 소녀’와 ‘네개의 바다’, ‘네 빛깔의 저고리’, 그리고 ‘한名의少女가 걱정을하면 세名의少女도 걱정을허며, 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연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앍안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하든 ’에서 볼 수 있듯이, 서정주 특유의 나열식 상징적이미지 표현들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아주 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삶과 죽음의 세계가 한 궤를 이루면서 그 영혼들의 힘에 의해 생명의 새로운 부활을 희구하고 있다.
해방 이후 대구를 대표하는 신동집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 지난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있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ㅡ신동집 시 '행인 1' 전문.
'길은 분명 같은 길'이지만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데 이 시의 핵심이 있다. 바로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이는 것이다. 시인은 관조의 눈으로 세상풍경을 보고 있는데, '행인'이라는 어휘자체가 인간은 누구나 이 땅위에 잠시 머물렀다가는 존재인 것이다.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 뿐만 아니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영원한 헤어짐이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펼쳐지는 풍경이 시인에게는 예사로 비치고 있는게 아니다. 이런 시인의 원숙된 달관의 경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가 지나는 풍경'이 존재해 있는 지금의 상황이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황동규시인의 시 <풍장(風葬)>이 말하는 생의 끝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이법인데, 그냥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노정으로 펼쳐 보이며 색다른 멋이 풍기는 작품으로 읽힌다.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ㅡ황동규의 시-'풍장(風葬)-1' 전문.
풍장으로 귀결되는 이 작품은 ‘옷은 입은 채로 /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그리고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결국 살을 말려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육신인 것이다. 황동규시인의 초탈의 세계는 이렇듯 문명의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데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시의 품격 가운데 그 하나가 표현력에 있다면 황동규의 시에서는 뛰어난 언어구사가 돋보이는데 이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손목시계 부서질 때’는 정지는 시간 즉 죽음의 의미이며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달라고 했으니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의 몫이 언어조직 속에 구체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 황동규시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 ㅡ'시는 구체적일 때 진실과 만난다'라고 했고 보면 말이다.
오세영시인 빚어낸 그릇의 시 <矛盾의 흙> 을 보자.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人間은 한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있는 흙,
누구나 人間은
한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絶對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矛盾의 그릇.
'흙이 되기 위하여 /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라 했다. '人間은 한번 죽'듯이 ''깨지는 그릇'의 비유가 참신하다. '인간은 한번 죽'듯이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 순간에 / 바싹 / 깨지는 그릇'이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높혀준다. 또한 그릇을 시인은 '살아있는 흙'이라 역설했다. 그릇만이 그러하겠는가. 이 세상 모든 형체가 있는 것은 모순덩어리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데 이 시가 갖는 의미인 것이다.
김명인시인의 ‘바다의 아코디언’을 보면 문장을 휘감는게 예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패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치, 천천히 파도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ㅡ김명인 시-‘바다의 아코디언’ 전문.
바다의 아코디언이라? 무얼 의미하는가. 쉴 새 없이 주름을 데리고 와 해변가에 부서지는 겹겹의 파도물결를 오래 바라보지 않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 착상이리라. 파도물살만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그 물이랑 사이로는 해조음까지 스며들어 함께 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천 년 수만 년을 아코디언을 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헛된 주름만 수시로 /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이라 했는가 하면,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나, 한 생애에 극한된 몸짓이 아니라는데 있다. 뒷받침해 주는 아주 고급적인 표현으로는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인데, 강한 역설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생멸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바다를 읽을 수 있다.
늙어감이란 어떤 것일까. 살다보면 늙는 게 당연하다. 그것에 비례하는게 회한일 것이다. 감태준시인의 시 <반성> 은 새의 깃털을 상징의 수단으로 잘 활용하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온종일 여기저기 허공에 빠뜨리고 다닌 깃털을 불러들인다
돌아온 깃털들은
머리맡에 접어둔 날개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지금
서둘러 오고 있거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변두리 변두리 허공을 떠돌아 다닌다
그러나 영영 잃어버리는 깃털이 없다고는 믿지 말자
내가 까맣게
그 이름과 얼굴을 잊고
부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돌아오지 못하는 깃털이 늘어나
두 날개의 살갗이 닳아지기 시작한다면!
그리하여 어느 날 뼈날개를 달고 공원에서 여린 햇빛
을 쬐고 있는 새가 되지 않는다고는
자신하지 말자
ㅡ감태준 시 '반성' 전문.
깃털이란 돋아나서 몸을 보호하는 수단인데, 시인은 그것을 추상적으로 변용시키고 있다. 즉, ‘돌아온' 깃털, ‘변두리 변두리 허공을 떠돌아 다’니는 깃털, ‘영영 잃어버린' 깃털 등 이 형이상의 깃털들은 시인의 지나온 삶을 에웨싼 갖가지 형상들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에서 빠져나가는 숱한 깃털을 통해서 회한과 성찰의 자세에서 시인은 바라보고 있는데 결국에 가서는 앙상한 몰골의 ‘뼈날개를 달고 공원에서 여린 햇빛을 쬐고 있는 새‘나 다름 없는 게 인간의 삶임을 시인은 인식하고 있다.
'내가 까맣게 / 그 이름과 얼굴을 잊고 / 부르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이가 들고 늙고 하면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들도 있는게 우리네 생인 것인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으로 김백겸시인의 시가 있다.
입이 넓은 후박나무가 걸어와서 묻는다
너는 그늘이 있느냐
내 삶이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수고로우니
햇빛을 피해 네 그늘에 앉을 수 있느냐
묻는다
생활에 바빠 그늘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후박나무가 나를 비켜가 시간 속을 향해 걸어간다
뒷모습을 전송하며 내가 말한다
그늘은 없지만 내 욕망이 너의 그늘을 만들 것이니
쉬어 가렴
후박나무가 힐끗 뒤돌아 보곤 숲을 향해 걸어간다
훗날에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등이 고단한 내가
후박나무를 향해 말한다
삶의 욕망을 끓인 내 심장이 터질 것 같구나
햇빛을 피해 네 그늘에 앉을 수 있느냐
후박나무가 고개를 들어 웃는다
내가 부끄러워 탄식한다
내 일찍이 욕망 대신 네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지 못했구나
ㅡ김백겸 시‘문답-3’ 전문.
김백겸 시인은 주로 일상의 생활상을 모티브로 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일상생활의 편린들이 시가 된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는 재주 있는 시인이다. 문장이 품고 있는 긴장력을 늦추면 안 되는 비법이 이 시인에겐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인생론과 다름없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후박나무와 안일한 삶의 소유자인 인간과의 대비가 풍자성을 띠며 뭉클하게 다가온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리라. 부지런히 시를 빚는 일을 망각하고 다른 것에 천착해 아까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위와 같은 존재가 되리라.
이 시의 특징은 '후박나무'와 '나'를 통한 대화체인 문답법으로 이루져 있다는데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부지런히 그늘을 만들어내는 후박나무의 일생과 이 핑게 저 핑게 대며 말뿐인 인간의 게으른 내면이 잘 비유되어 있다. 문제는, '내 삶이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수고'롭다니 이 따위 변명을 널어놓을 바엔 나중 가서 '내 일찍이 욕망 대신 네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지 못했구나' 따위의 말은 하지 말지어다. 후박나무의 가르침이 스승의 가르침이요, 뜻을 품었으면 후박나무처럼 그늘을 만들어 갈 일이다. 인생은 신발처럼 그냥 따라가다가 닳아버리고, 닳아버리면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싣는게 아니잖은가 말이다.
지금이라도 이 시를 통해서도 깨닫는 이 있다면 당신의 참스승은 '후박나무'일 것이다. 혹 길 가시다가, 상당히 바쁘시겠지만 (유명인사처럼) '후박나무'를 만나거들랑 먼저 절을 올리시고서 한참을 바라보며 그 큰 잎새의 그늘이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서 가시던 길을 다시금 가시기를!
최승호의 시인의 <공터>보면 미묘한 표현들을 만날 수 있는데 눈여 보자. 그리고 공터가 깆는 의미도 함께 느껴 보자.
아마 무너뜨릴 수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 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다
공터에 지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늘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발자국을 남긴다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을 자리에 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ㅡ최승호의 시 '공터' 전문.
고요가 공터의 왕이라 했다. 이보다 텅 빈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공터에 풀씨들이 날아와 꽃을 피우고 늙고 시들고 하지만 공터는 ’아무런 말 없’으니 무소유가 따로 있겠는가. 즉, ‘베풀어 주고‘는 거둬들이려 하지 않는 마음과 같이 도마뱀, 새 발자국, 하늘의 빗방울들, 등 놀게 하니 넉넉한 마음 가이 짐작이 가며 공터의 본분인 그 ’흔적 오래가지 못하며 지우고 있다‘했는데 그게 공터가 공터로 서 존재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가 깊은 울림을 준다면 주저할 것 없이 이 작품이 아닌가 한다. 공터는 공터일 뿐인데 '바람', '풀씨', '꽃', '도마뱀', '새발자국', '빗방울' 등이 자유자재하게 놀다가는 포용성마저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요가 / 공터를 지배하는 왕'이라고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이만한 통찰력과 이만한 그릇의 존재를 인간세상에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시에서 보여주는 순간적인 색(色)의 세계와 영원한 공(空)의 세계를 통해 만물의 존재라는게 덧없을 수도 있는 것이며, 변함없는 공터가 자리매김 됨으로서 시간의 역사는 말없이 흐르는게 아닐까.
생의 끝은 어디인가. 어떤 모습으로 놓여있는가. 이런 물음은 생명이 있는 것이나 생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나 보다. 평생을 바퀴가 되어 달리던 타이어가 폐차됨으로 해서 폐차나 폐타이어가 되어 있는 모습은 인간으로 말하면 숨을 거둔 형상과 같다. 진정한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했듯 그건 삶이 정지된 상태에서 가능함을 제시해 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박남희시인의 시 <폐차장 근처> 이다.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는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ㅡ박남희 시 '폐차장 근처' 전문.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 질주하며 살아온 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는 폐차의 모습에서 '죽음은 결국 / 또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듯, 햇살은 나에게 /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는'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죽음은 결국 /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비중 있는 표현에도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삶의 완성이라 해야 옳을까. 살아온 인생사의 요약 또는 결집이라 해야 할까. 정숙자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의자 위의 책'>을 만나보자.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슬픔이 앉는다
오래 거닌 슬픔을 위해 바람은 자리를 비킨다
슬픔은 내내 낮은 어깨를 하고 있다
낮은 어깨는 그러나 그늘을 입었을지라도
중심을 위해 푸른 빛을 고른다
떡잎처럼, 몇 방울 이슬이 쉬어갈 아침을 근심한다
눈물이 아니다 슬픔의 방향은
앞날을 향해 있다
눈꺼풀 속에서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이 나타난다
일 나노미터 오차도 섞이지 않은 두 어깨의 균형
날으는 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나비! 나비! 나비도 그것이 하늘을 열었을 게다
그것이 잡히면 울음도 출렁거림을 벗어나는가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귀 낡은 책이 펼치어 있다
지새워 엮었을 행간 사이로 햇살이 들락거린다
팔 랑 팔 랑 두 쪽의 날개에 실려
한 생애가 묵묵히 자연으로 돌아간다
ㅡ정숙자 시 '의자 위의 책' 전문.
책이란 인생의 결집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며,. 생의 완성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자'란 쉬고 있는 존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세파의‘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귀 낡은 책이 펼쳐어 있다’고 했으니 바람은 시간의 연속인 세월일 것이며 ‘귀 낡은 책’이란 한 생을 살아온 인간의 닳은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지세워 엮었던 생’이 바로 숨 가쁘게 살아온 인생노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첫행에서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슬픔이 앉는다’고 했다. 슬픔이란 고단하게 살아온 인간의 육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회한 같은 것일 게다. ‘슬픔이 낮은 어깨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이젠 갈앉은 삶을 지칭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생을 내려놓는 듯한 숙연함이 잘 배어나고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다음의 작품에 귀 기울여 보자.
어느 날 나는 내가 잠든 틈에 시계들 사이에 벌어진 언쟁을 들었다. 그날 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것들이 대체 무엇에 대하여 다투고 있었는지 아는가? 유산분배, 내가 죽은 뒤 내가 남길 유산을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고 있었단다.
그렇지만 내가 죽은 뒤 고아가 된 나의 시계들을 위하여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몇 편의 바보스런 소설과 우스꽝스런 시를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없지. 그런데 그것들이 대체 무얼 위해서 그토록 격렬히 다투었던지 아느냐?
오, 부처님! 내 불쌍한 시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벽시계는 다른 시계들을 향하여 자신은 나의 외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오랫동안 나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외투! 그건 지난 가을 길버트 거리에 있는 중고품상에서 산 것인데......
그러나 탁상시계는 반대하며 말하기를 오직 자신만이 아침마다 내 잠을 방해함으로써 내 생명을 단축하는데 실제적으로 기여했으니 외투는 물론이고 내 구두까지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내 구두! 그건 지난해 자살한 내 러시아 친구 마크 샤트노부스키로부터 얻은 것인데.....
손목시계마저 나서서 자신이야 말로 내 손목에서 나는 악취를 참으면서 오직 내가 죽기만을 기다려 왔다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내 소설과 시따위는 원치 않았다.
오, 부처님! 내불쌍한 시계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그것들의 그 더러운 논쟁을 들으면서 나는 몹시 민망스러웠던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것들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ㅡ하일지 시 ‘시계들의 푸른 명상’ 전문.
익살과 풍자를 동반하면서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소설가이니 문장을 전개해 나가는 솜씨도 유려하다. 벽시계, 탁상시계, 손목시계를 통해서 보여주는 세계는 물욕의 인간세상을 까발리는데 한몫하고 있다. 외투나 구두 이런 것들만을 서로 차지해야 된다고 야단들이지 주인공의 소설과 시 따위는 관심없다는 것에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유산을 두고 다투는 상황 다름 아닌데, 물질에 눈먼 세상을 풍자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첨언하자면 하일지는 내 고교동기인데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민음사에서 시집도 한 권 낸 바 있다.
원희석시인의 시'<수박씨와 파리>는 어떤가 보자.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다 나는 누가 살아있는 것인지 잘 모른다 눈이 멀어지고 있다
수박씨 겉면이 딱딱하다고 파리의 날개가 부드럽다고 지나가는 햇빛들은 말하지만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은 것인가
파리가 수박씨를 깔고 앉아 손바닥에 묻는 더러움을 싹싹 떨어내고 있는 저 죽음에 대한 기도를 수박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
수박씨가 파리를 끌어안고 있다 내몸의 달콤한 사랑을 곧 죽을 너에게 주노니 난 그리하여 다시 파란 생명을 이어가노니
ㅡ원희석 시 '수박씨와 파리' 전문.
한낱 미물에 불과한 파리와 수박씨, 두 존재의 정황을 풍자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게 돋보인다. 기발한 상상력과 거기에 절묘한 표현이 가미되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는데 '누가 살아있는 것인지 잘 모른다 눈이 멀어지고 있다', 거기다가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은 것인가'.시인의 직관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 죽음에 대한 기도를 수박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인데, 수박씨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다'에서 수박씨가 파리를 끌어안고 있다'로 반전을 거듭하며 효과를 얻고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파리와 수박씨간의 상응관계를 예사로 보지 않는 시인의 안목이 놀랍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이여!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조만조시인의 시 <왕유를 만나다>는 또 다른 색깔을 띠고 있어 주목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믿는다.
한 폭에 실은 두 계절
자두꽃과 국화,
모두들 계절을 혼돈했다고 야단이다
이합집산에 익숙한 구름떼서리와
허접쓰레기들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의
하모니
왕유, 그가 혼돈한 것은 분명
허물어뜨릴 수 없는
관념의 벽 무너뜨린 것 아닐까
아상을 죽이지 못해 세상 물결에
휩쓸릴 줄 몰랐던
한낱 모난 돌맹이인 나,
문득 만나게 된 왕유
조화와 부조화 사이 상생을 고민했을
그
봄과 가을 한 폭에 불러들인 이유
이제 알 것 같다
ㅡ조만조 시 ‘왕유를 만나다’ 전문.
이 시는 왕유가 그린 한 폭 그림에서 떠올린 발상을 자신의 삶과 잘 대비시킨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인간사에서 고정관념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찌기 왕유는 고정관념을 깨드려 ‘자두꽃과 국화’를 함께 그렸으니 이는 혼돈이며 부조화 다름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상을 죽이지 못해 세상 물결에 / 휩쓸릴 줄 몰랐던 / 한낱 모난 돌맹이인’ 시인 자신이 왕유의 그림을 접한 충격은 인생사의 큰 깨달음인 것이다.
이재무시인의 <가방에 대하여>도 예사로 읽히지 않는다.
늦은 밤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을 본다
가방을 끌어다 무릎에 올려놓고
지퍼를 연다
달짝지근한 나날의 욕망이 들숨날숨을 내쉬고 있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가방을 바꾸게 되었다
운명처럼 만나고 보낸 여자보다 더 많이
그를 만나고 보내온 것이다
처음엔 주어진 것이었으나 어느 날 이후 그것은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비닐에서 가죽까지 나를 다녀간
그 무수한 모양과 색깔의 가방들
그들은 늘 능력보다 비대한 주인의 기대로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버려지고는 하였다
조강지처같이 생의 어두운 통로 바지런히 오,
갔지만 그들의 헌신을 주인은 기억하지 않았다
세상에 가방처럼 흔한 것도 없다
주인은 이제 실용만으로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주인은 변덕을 자주 부린다
가방의 수명은 짧아져 간다
입을 꾹 다문 가방
그라고 해서 왜 인욕의 세월이 없었겠는가
늦은 밤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을 본다
끌어다 무릎에 올려놓고
사연많은 생을 살다 간 무수한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ㅡ이재무 시 '가방에 대하여' 전문.
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방이 아니라 '구석에 처박혀 우는 가방'이다. '운명처럼 만나고 보낸 여자보다 더 많이 / 그를 만나고 보'냈다고 시인은 술회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무수한 모양과 색깔의 가방들'로 여자나 다름없는 '선택의 대상'으로써 말이다.
이 시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사물 즉 그 대상과의 교감이 그것인데 그저 그런 교감의 차원을 넘어서서 '가방이 지니고 있는 인욕의 세월'과 그들의 헌신을 주인이 기억하지 못하는데 있다. 또한 '가방의 수명은 짧아져 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골자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애정이 깃든 것들로 인간적 향수가 따뜻하게 울려온다. 그리고 여자와 가방의 비유가 이 시인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재치로 읽혀진다. 아니 그런가.
김세웅시인의 시 <그 사람의 肖像>에서 묻어나는 중년남성의 쓸쓸함은 또 어떠할까.
공중전화부스에서
통화를 마치고 그가 나온다
나와선 담배를 필까 망설이다가
골목길로 들어선다
골목길은 굽어 있어, 곧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골목은 양손에 집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힘겹게 이어진다
지나간 통화를 골똘히 생각느라 그는
함께 가는 골목의 지친 옆모습을 보지 못한다
높은 그리고 파아란 하늘에
그의 골똘한 생각이 비친다
얼굴만 들어 쳐다보면 될 것을,
그는 골똘히 잠기느라
자신의 생각을 보지 못한다
함께 가는 골목이 힘겨운 어깨를
슬며시 그의 어깨에 기대어도
알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담배를 피워 문다
그의 생각 대신 숨통이 터진 담배연기가
코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와
흩어지며 그의 생각을 지운다
ㅡ김세웅 시 '그사람의 肖像' 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구구절절 확고한 이미지 처리 방식과 담고 있는 깊은 의미까지를 한꺼번에 제공받는 감명을 받는다. 시인은 '공중전화부스에서 / 통화를 마치고 그가 나온다'고 했는데 어디에 누구에게 뭐라고 통화했을까. 그 내용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단지 '나와선 담배를 필까 망설이다가 / 골목길로 들어'설 뿐인데 여기서도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즉 여러 현실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남성들의 고민을 총체적으로 생각케 하는 대목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예사로 읽히는 시와는 다른 게 개인사의 고뇌를 다루면서 사회성을 짙게 깔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남성사회의 고민이 시인 개인의 고뇌에서 비롯됨을 인식할 수 있다.
사회성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작품으로는 차창룡시인의 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쟁기질을 한다, 잡풀과 쓰레기와 먼지들이 서식하는
밭,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해 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놓은 그 밭을 갈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환자의 배를 수술하듯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마취된 이 땅의 피부에 보습날을
댄다.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태어난다. 지렁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굽벵이가
어려운 걸음을 나선다. 빛 바랜 신문지가 아득한 사건 속으로
묻히고, 신문지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의 뼈들이
일어선다. 이러 이러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채찍을 휘두르고, 황소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
오줌을 싸고, 지렁이가 그것을 맞고 몸으 뒤튼다.
굼벵이도 그것을 맞고 움찔거리고, 수천의 뼈들도 그것을 맞고
화게 빛나고, 신이 난 보습날이 그들 사이를
다시 한번 지나간다. 날 끝으로 뼛조각이 묻어오고
뼛조각이 날 끝에서 땀을 흘린다. 이제는 뼛조각이
쟁기질을 하는지, 아버지와 황소는 힘든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으로
쟁기질을 한다 쟁기질을 한다.
ㅡ차창룡 시 ‘쟁기질 1’ 전문.
미당의 시 <자화상>에 보면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시에서도 아버지의 고된 노동의 삶이 배어있다.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해 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놓은 그 밭을 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노동의 쟁기질이 아니다. 쟁기질을 매개로 해 세상을 풍자해 읊은 작품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댜.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 태어나'는 쟁기질 속에서 세상이 뒤바뀌고 있다. 거기 지렁이 굼벵이 수천의 뼈들이 암흑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드는 것이다.
무얼 말하는가. 억압되고 가리워져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한 것들이나 은폐된 상흔 또는 흔적들이 속속들이 드러난 속 시원한 광경이기도 하다. 어떤 대립적인 힘의 작용이 아닌 노동의 땀으로 일구어내는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인 것이다.
최준시인의 시에서는 시장통의 닭집 풍경 속에서 읽어내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닭은 행복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져 텅 빈 몸뚱아리로
죽어서도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타고
비닐봉지에 뚤뚤 말려 젊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가고 아이가 흔드는 요령소리 따라
저 많은 닭들이 호곡하는 가운데
유유히 떠난다 풍진세상, 한도 많았다
눈알이 빠알간 닭들이 무한정으로
대량학살을 당하는
닭집 골목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5분
역겨운 비린내 속에서의
5분간의 보행 중
나는 본다 닭장에갇힌닭껍데기가 벗겨진
닭내장을드러낸닭대라기가 없은닭깃이빠
진닭눈꼽이낀닭다리가잘린닭비쩍마른닭
살이오른닭벼슬이붉은닭트럭에과적된닭
승용차에올라탄닭목욕하고있는닭윤간당하는
닭시위중인닭절규하는닭분신하는닭,닭닭
닭닭들의
5분간이다 골목을 지나는,
비린내로 울렁거리고
털이 너저분한,
그것도 이웃이라고 함께 세상 뜨자며
눈알이 빨갛게 울어들 대는
ㅡ최준 시 ‘닭’ 전문.
역시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가운데 하나다. 보라,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져 ‘텅 빈 몸뚱아리’로 비닐봉지에 싸여 팔려가는 생닭의 죽음을 ‘행복하다’고 긍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하면, 젊은 아낙과 아이 실은 유모차가 장보고 돌아가는 모양인데, 아이가 흔드는 장난감의 소리 또한 저승갈 때 상여 앞을 이끄는 ‘요령소리’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시장 난전에 살아있는 닭들의 소리를 ‘호곡’한다고 했다. 시인은 이제 그 생닭을 ‘유유히 떠난다 풍진 세상, 한도 많았다’고 귀결 짓는다.
이 광경의 구체화된 표현의 시간적 거리는 걸어서 5분 걸리는 시장통의 닭집 골목인 것이다. 이 5분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흐름이지만 삶과 죽음이 뒤범벅 되어 연출되는 시장의 닭집 풍경은 인간세상의 풍경 다름 아님을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춘천의 강원대학에 몸담고 있는 박기동시인의, 좀 이색적이라 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보자.
1994. 여름의 끝이었어.
한 여자와 함께 길을 떠났어.
홍천 내면을 지나면서 애틋한 얘기가 시작되었지.
도토리 막국수를 시켜먹을 때,
그 여자 그 집 개를 무서워하며 내 뒤로 몸을 숨겼어.
놓아버린 남자를 기억하면서 쓰다듬으면서
혼자 살고 있는 그 여자
언젠가 와본 적 있다. 저녁 막차로 운두령을 넘어
찾아온 사람은 공교롭게 그날 떠나고, 그가 묵던
하숙집 바로 그 방에서 하룻밤 신세지고 나설 때
내면 들어가는 다릿목이 휘영청 꺾여 있었지.
한 여자와 함께 내면 깊이 들어가고 있을 때
휘영청 꺾어진 그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이미 나는 환상여행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었어.
1994. 그 여름의 끝
갑자기 길 떠난 환상여행
길 끝에는 한 여자 젖어 있었어. 추억에 삶에
쏘주에 젖어 있었어.
그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때인 한 여자
홍천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ㅡ박기동 시-한 여자 홍천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네
단편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는데 이 시가 지니는 향토적 소재가 더욱 매력적으로 읽힌다. 강원도 홍천이라는 곳의 도토리 막국수가 정겹게 와 닿는다. 향토적인 소재인 '운두령'도 지역성을 잘 드러내주는데 한몫 하고 있다. 떠올려지는 풍경 또한 TV문학관을 보는 듯하다.
이 시가 갖는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밑그림이 스토리와 맞물려 잘 채색되어 있어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홍천 내면이 보여주는 세계가 이러할질데 '놓아버린 남자를 기억하면서 쓰다듬으면서' 에서 풍기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애환 또한 이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환상여행'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꿈만 같던 한 때인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하고나 동행하게 되는 시간과 인연이 주어지는데 한 여인의 말벗이 되어준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내가 오히려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 된다는 것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때인' 것처럼.
의미 있게 느껴지는‘1994. 여름의 끝’이라는 여운이 아쉬움을 더해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전영주시인의 시 <물>은 오래전 전국 마로니에 여성백일장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은 작품이다. 가수 이동원씨가 낭독을 하여 음반에도 수록된 바 있기도 하다.
나는 본시 얼굴도 마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게 비추이는 그대가 나를 다스릴 뿐입니다.
나는 색깔도 냄새도 형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슬픔이 흰 뼈만 남도록.
그대 사랑이 그대 눈빛으로 빛나도록. 씻어드릴 순
있습니다.
그대는 나를 흘러간다 여기나
그대 앞에 나는 늘 고여 있습니다.
그대 마음 속에 달 뜨면 달을 잡고
그대 건너는 발목 있으면 발목을 잡고.
잡은 모든 것들을 흐름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그대로 하여
잊혀진 채 나는 그대 눈물샘 속에서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그대도 아시겠지요.
달은 세상의 모든 강에 동시에 떠오르고.
그대가 잡은 발목 하나로는
그 모든 강. 쉬이 건너갈 수 없음을.
언젠가는 그대 스스로 가슴 속의 물꼬를 트고.
그 물길을 따라 나서겠지요.
그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반짝이며 결 곱게 흐르겠습니다.
그대는 본시 얼굴도 마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에게 비추이는 내 모습이
그대의 가장 오래 된 모습인 것입니다.
ㅡ전영주 시-'물'전문.
물의 존재를 읊고 있다. 특이한 수법으로 씌어진 시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이 호숫가에 서 있는데 자신을 비추고 있는 호수를 1인칭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이 자신으로 색깔도 냄새도 형태도 없는 존재로 나타난다.‘그대는 나를 흘러간다 여기나 / 그대 앞에 나는 늘 고여 있습니다’. 라고 했다. 물의 속성은 GM르는 것이나 여기서는 잠시 고여 있는 호수의 물인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반전의 효과를 주고 있는데 시인인 ‘나’가 1인칭 주체가 되면서 물은 그 대상으로 바뀌는 수법이 그것이다. 인간인 ‘나’가 물에게 ‘그대는 본시 얼굴도 마음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그대에게 비추이는 내 모습이 / 그대의 가장 오래 된 모습인 것입니다.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